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다 당신입니다
- 김용택
개나리꽃이 피면 개나리 꽃 피는 대로
살구꽃이 피면은 살구꽃이 피는 대로
비오면 비오는 대로
그리워요
보고 싶어요
손잡고 싶어요
다
당신입니다
꽃 피는 봄엔
- 용혜원
봄이 와
온 산천에 꽃이 신나도록 필 때면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겨우내 얼었던 가슴을
따뜻한 바람으로 녹이고
겨우내 목말랐던 입술을
촉촉한 이슬비로 적셔 주리니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리라.
온몸에 생기가 나고
눈빛마저 촉촉해지니
꽃이 피는 봄엔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리라.
봄이 와
온 산천에 꽃이 피어
님에게 바치라 향기를 날리는데
아! 이 봄에
사랑하는 님이 없다면 어이하리
꽃이 피는 봄엔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리라.
이 꽃잎들
- 김용택
천지간에 꽃입니다
눈 가고 마음 가고 발길 닿는 곳마다 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지금 꽃이 피고, 못 견디겠어요
눈을 감습니다 아, 눈감은 데까지 따라오며 꽃은 핍니다
피할 수 없는 이 화사한 아픔, 잡히지 않는 이 아련한 그리움
참을 수 없이 떨리는 이 까닭없는 분노 아아
생살에 떨어지는 이 뜨거운 꽃잎들
다시 오는 봄
- 도종환
햇빛이 너무 맑아 눈물이 납니다
살아 있구나 느끼니 눈물이 납니다
기러기떼 열지어 북으로 가고
길섶에 풀들도 돌아오는데
당신은 가고 그리움만 남아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살아 있구나 생각하니 눈물납니다
봄 꽃피는 날
- 용혜원
봄 꽃피는 날
난 알았습니다
내 마음에
사랑나무 한 그루 서 있다는 걸
봄 꽃 피는 날
난 알았습니다
내 마음에도
꽃이 활짝 피어나는 걸
봄 꽃 피는 날
난 알았습니다
그대가 나를 보고
활짝 웃는 이유를
봄은 왔는데
- 이정하
진달래가 피었다고 했습니다
어느 집 담 모퉁이에선 장미꽃이 만발했다고 합니다
그때가 겨울이었지요, 눈 쌓인 내 마음을
사륵사륵 밟고 그대가 떠나간 것이
나는 아직 겨울입니다
그대가 가 버리고 없는 한 내 마음은 영영
찬바람 부는 겨울입니다
매화가 필 무렵
- 복효근
매화가 핀다
내 첫사랑이 그러했지
온밤내 누군가
내 몸 가득 바늘을 박아넣고
문신을 뜨는 듯
꽃문신을 뜨는 듯
아직은
눈바람 속
여린 실핏줄마다
핏멍울이 맺히던 것을
하염없는
열꽃만 피던 것을.....
십수삼년 곰삭은 그리움 앞세우고
첫사랑이듯
첫사랑이듯 오늘은
매화가 핀다
봄 햇살 속으로
- 이해인
긴 겨울이 끝나고 안으로 지쳐 있던 나
봄 햇살 속으로 깊이깊이 걸어간다
내 마음에도 싹을 틔우고
다시 웃음을 찾으려고
나도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눈을 감고
들어가고 또 들어간 끝자리에는
지금껏 보았지만 비로소 처음 본
푸른 하늘이 집 한 채로 열려 있다
봄길
- 곽재구
매화꽃이 피면
다사강 강물 위에
시를 쓰고
수선화꽃 피면
강변 마을의 저녁 불빛 같은
시를 생각하네
사랑스러워라
걷고 또 걸어도
휘영청 더 걸어야 할
봄 길 남아 있음이여
봄을 기다리는 그대에게
- 홍수희
그대 마음에
봄이 온다면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자주
벗어버리고 싶었던
사랑의 무게,
어깨를 짓누르던
네 삶의 무게
인내하는 마음에
봄이여, 오시리니
네 영혼에
눈부신 봄이 온다면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봄날, 사랑의 기도
- 안도현
봄이 오기 전에는 그렇게도 봄을 기다렸으나
정작 봄이 와도 저는 봄을 맞지 못했습니다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소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 해서
이 세상 전체가 따뜻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갓 태어난 아기가 응아, 하는 울음소리로
엄마에게 신호를 보내듯
내 입 밖으로 나오는 사랑해요, 라는 말이
당신에게 닿게 하소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남의 허물을 함부로 가리키던 손가락과
남의 멱살을 무턱대고 잡던 손바닥을 부끄럽게 하소서
남을 위해 한번도 열려본 적이 없는 지갑과
끼니때마다 흘러 넘쳐 버리던 밥이며 국물과
그리고 인간에 대한 모든
무례와 무지와 무관심을 부끄럽게 하소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하소서
큰 것보다도 작은 것이 좋다고,
많은 것보다도 적은 것이 좋다고,
높은 것보다도 낮은 것이 좋다고,
빠른 것보다도 느린 것이 좋다고.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그것들을 아끼고 쓰다듬을 수 있는 손길을 주소서
장미의 화려한 빛깔 대신에
제비꽃의 소담한 빛깔에 취하게 하소서
백합의 강렬한 향기 대신에
진달래의 향기 없는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떨림과 설렘과 감격을 잊어버린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은 몸에도 물이 차 오르게 하소서
꽃이 피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얼음장을 뚫고 바다에 당도한
저 푸른 강물과 같이 당신에게 닿게 하소서.
꽃을 보려면
- 정호승
꽃씨 속에 숨어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봄꽃을 보니
- 김시천
봄꽃을 보니
그리운 사람 더욱 그립습니다
이 봄엔 나도
내 마음 무거운 빗장을 풀고
봄꽃처럼 그리운 가슴 맑게 씻어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고 싶습니다
조금은 수줍은 듯 어색한 미소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피었다 지고 싶습니다
봄이 오면 나는
- 이해인
봄이 오면 나는
활짝 피어나기 전에
조금씩 고운 기침을 하는 꽃나무들 옆에서
덩달아 봄앓이를 하고 싶다.
살아 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 올리는 꽃나무와 함께
나도 기쁨의 잔기침을 하며
조용히 깨어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햇볕이 잘 드는 안뜰에
작은 꽃밭을 일구어 꽃씨를 뿌리고 싶다.
손에 쥐면 금방 날아갈 듯한
가벼운 꽃씨들을 조심스레 다루면서
흙냄새 가득한 꽃밭에 고운 마음으로
고운 꽃씨를 뿌리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매일 새소리를 듣고 싶다.
산에서, 바다에서, 정원에서
고운 목청 돋우는 새들의 지저귐으로
봄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나는 새들의 이야기를 해독해서
밝고 맑은 시를 쓰는 새의 시인이 되고 싶다.
바쁘고 힘든 삶의 무게에도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의 은빛 날개 하나를
내 영혼에 달아주고 싶다.
봄이 오면 조금은 들뜨게 되는
마음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더욱 기쁘고 명랑하게 노래하는
새가 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이슬비를 맞고 싶다.
어릴 적에 항상 우산을 함께
쓰고 다니던 소꼽동무를 불러내어
나란이 봄비를 맞으며 봄비 같은
이야기를 속삭이고 싶다.
꽃과 나무에 생기를 더해주고
아기의 미소처럼 사랑스럽게
내 마음에 내리는 봄비,
누가 내게 봄에 낳은 여자 아이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면 서슴없이
'봄비' '단비'라고 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풀향기 가득한 잔디밭에서
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 동요를 부르며
흰구름과 나비를 바라보는 아이가 되고 싶다.
함께 산나물을 캐러 다니던
동무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고,
친하면서도 가끔은 꽃샘바람 같은
질투의 눈길을 보내 오던
소녀시절의 친구들도 보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우체국에 가서 새 우표를 사고
답장을 미루어 둔 친구에게
다만 몇 줄이라도 진달래빛 사연을
적어 보내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모양이 예쁜 바구니를 모으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솔방울, 도토리,
조가비, 리본, 읽다가 만 책,
바구니에 담을 꽃과 사탕과 부활달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선물들을
정성껏 준비하며
바쁘고도 기쁜 새봄을 맞고 싶다.
사계절이 다 좋지만
봄에는 꽃들이 너무 많아 어지럼증이 나고
마음이 모아지지 않아 봄은
힘들다고 말했던 나도 이젠 갈수록 봄이
좋아지고 나이를 먹어도
첫사랑에 눈뜬 소녀처럼 가슴이 설렌다.
봄이 오면 나는
물방울무늬의 옆치마를 입고 싶다.
유리창을 맑게 닦아
하늘과 나무가 잘 보이게 하고
또 하나의 창문을 마음에 달고 싶다.
먼지를 털어낸 나의 창가엔
내가 좋아하는 화가가 그린 꽃밭,
구름 연못을 걸어 두고,
구석진 자리 한곳에는 앙증스런 꽃삽도
한 개 걸어 두었다가 꽃밭을
손질할 때 들고 나가야겠다.
조그만 꽃삽을 들고
꽃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아름다운 음성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나는 멀리 봄나들이를 떠나지 않고서도
행복한 꽃 마음의 여인
부드럽고 따뜻한 봄 마음의 여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봄
-윤동주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어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봄
-김광섭
얼음을 등에 지고 가는 듯
봄은 멀다
먼저 든 햇빛에
개나리 보실보실 피어서
처음 노란 빛에 정이 들었다
차츰 지붕이 겨울 짐을 부릴 때도 되고
집 사이에 쌓인 울타리를 헐 때도 된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가장 먼 데서부터 시작할 때도 온다
그래서 봄은 사랑의 계절
모든 거리가 풀리면서
멀리 간 것이 다 돌아온다
서운하게 갈라진 것까지도 돌아온다
모든 처음이 그 근원에서 돌아선다
나무는 나무로
꽃은 꽃으로
버들강아지는 버들가지로
사람은 사람에게로
산은 산으로
죽은 것과 산 것이 서로 돌아서서
그 근원에서 상견례를 이룬다
꽃은 짧은 가을 해에
어디쯤 갓다가
노루꼬리만큼
길어지는 봄해를 따라
몇 천리나 와서
오늘의 어느 주변에서
찬란한 꽃밭을 이루는가
다락에서 묵은 빨래뭉치도 풀려서
봄빛을 따라나와
산골짜기에서 겨울 산 뼈를 씻으며
졸졸 흐르는 시냇가로 간다
봄
-김용택
바람 없는 날
저문 산머리에서 산그늘 속을 날아오는
꽃잎을 보았네
최고 고운 몸짓으로
물에 닿으며
물 깊이 눈감는 사랑을 보았네
아아, 나는 인자 눈감고도 가는
환한 물이네
봄
-오탁번
소쩍새는
밤 이슥토록 울고
조롱조롱 금낭화
붉은 꽃잎이 짙다
너비바위 틈에 피어난
개미딸기
오종종오종종
노란 꽃잎이 여리다
하늘 높이 뜬
솔개 눈씨에
참새도 오목눈이도
찔레넝쿨 사이로 숨는다
하느님이
수염에 묻은 황사를 턴다
붕어들이 알 낳느라
몸을 떨며 피 흘린다
봄눈
-정호승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절벽 위를 무릎으로 걸어가지 말라
봄눈이 내리는 날
내 그대의 따뜻한 집이 되리니
그대 가슴의 무덤을 열고
봄눈으로 만든 눈사람이 되리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였다고
올해도 봄눈으로 내리는
나의 사람아..
봄비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봄비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되어 짙어 오겠지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엔
종달새만 무어라 지저귀고
시새워 벙그러질 고운 꽃밭속
수줍은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이 비 그치면
님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은 내 마음
땅에서 또 아지랭이 되어 타오르 겠지
봄은 간다
-김 억
밤이도다
봄이다
밤만도 애달픈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깊은 생각이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새가 슬피 운다
검은 내 떠돈다
종소리 비낀다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ㅎ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봄은 고양이로다
-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香氣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生氣가 뛰놀아라.
다시금 봄날에
-김남조
가랑잎 나의 영혼아
만국(晩菊) 한 송이
물오리처럼 목이 시린 조락의 뜰에
너 함께나도 볼이 젖는다
그 전날
그 푸른 산바람
해설픈 초원에 떠놀던
여른여른 눈여린 고운 불수레 하며
멀리 메아리져서 돌아들 오던
그리운 노래 그리운 이름
펴며 겹치며 드높이 손짓하는
송이 송이 탐스런 떼구름들
네가 그들을
얼마나 가슴 바쳐 사랑했음인가를
내가 안다
지금은 땅에 떨어져
매운 돌부리에 찢기우는 너여
가랑비 보슬보슬 내림과 같고
소물소물 살눈썹이 웃음과 같은
네 달가운 모든것
오직
그들 호사스런 계절의
풍요한 아름다움 앞에 바친 푸른 찬가
헌신이던걸 내가 안다
그러나 지금은 가야지
지금은 눈감고 고이 가야지
지열이 돌아오는 어느 봄날에
다시금 어린아이처럼
손 흔들며 깨어나리라
찬서리 소리도 없이 내리는 뜰에
핏줄기 얼음 어는
가랑잎 내 헐벗은 영혼아
초봄의 귀밑머리
-김지향
방금 머리 내민 봄
햇빛을 만져본다
빛꼬리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
풀밭에 뒹군다
햇빛의 발이 콩.콩,콩,
자죽을 찍는 풀잎마다
연두빛 얼굴이 된다
봄의 빛은 발이 간지럽다
[손으로 움켜잡으면
몸이 가루되어 먼지처럼 날리지만]
햇빛이 빗금을 그은 곳마다
아지랑이가 죽어버린다
아지랑이 뒤에 머리를 숨긴
풀이 쏘옥. 쏙 혀를 내민다
보들한 바람에
파란 혀를 날름대는 풀
초봄의 귀밑머리가 내 뺨에서
파르랗게 나팔댄다.
봄날, 사랑의 기도
-안도현
봄이 오기 전에는 그렇게도 봄을 기다렸으나
정작 봄이 와도 저는 봄을 제대로 맞지 못했습니다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소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 해서
이 세상 전체가 따뜻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갓 태어난 아기가 응아,하는 울음소리로 엄마에게
신호를 보내듯
내 입 밖으로 나오는 사랑해요,라는 말이 당신에게
닿게 하소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남의 허물을 함부로 가리키던 손가락과
남의 멱살을 무턱대고 잡던 손바닥을 부끄럽게 하소서
남을 위해 한 번도 열려본 적이 없는 지갑과
끼니때마다 흘러 넘쳐 버리던 밥이며 국물과
그리고 인간에 대한 모든 무례와 무지와 무관심을
부끄럽게 하소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하소서
큰 것보다도 작은 것도 좋다고,
많은 것보다도 적은 것도 좋다고,
높은 것보다도 낮은 것도 좋다고,
빠른 것보다도 느린 것도 좋다고,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그것들을 아끼고 쓰다듬을 수 있는 손길을 주소서
장미의 화려한 빛깔 대신에 제비꽃의 소담한 빛깔에
취하게 하소서
백합의 강렬한 향기 대신에 진달래의 향기 없는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떨림과 설렘과 감격을 잊어버린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은 몸에도
물이 차 오르게 하소서
꽃이 피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얼음장을 뚫고 바다에 당도한 저 푸른 강물과 같이
당신에게 닿게 하소서
이 봄의 축제
-김종해
그대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나
그대 뜻에 따라
이 봄에 풀잎은 일어서고
꽃들은 하늘에다 오색 종이를 날린다
일어선 풀잎 하나만 보아도
눈물나는 이 봄에
황사는 자욱하게 하늘을 가리고
일어서라일어서라일어서라고
누가 외치지 않아도
저 하찮은 들꽃들마저 일어서서
하늘에다 오색 등불을 매단다
嚴冬에 엎드려 숨죽이던 것들아
척박한 황지에 뿌리내린 쑥맥들아
누가 오늘의 이 축제를 숨어서 구경하랴
그대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나
그대 뜻에 따라
이 봄에 나도 풀잎으로 일어서서
황사 흩날리는 하늘에다 새를 날린다
아아, 이름을 짓지 않은 한 마리의 새를!
봄이 오는 길목에서
-이해인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내 마음엔 조금씩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꽃을 피우고 싶어
온몸이 가려운 매화 가지에도
아침부터 우리집 뜰 안을 서성이는
까치의 가벼운 발결움과 긴 꼬리에도
봄이 움직이고 있구나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내 마음의 바위 틈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어서는 봄과 함께
내가 일어서는 봄 아침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보는 사람들이
모두 새롭고 소중하여
고마움의 꽃망울이 터지는 봄
봄은 겨울에도 숨어서
나를 키우고 있었구나.
꿈같이 오실 봄
-오광수
그대!
꿈으로 오시렵니까?
백마가 끄는 노란 마차 타고
파란 하늘 저편에서
나풀 나풀 날아오듯 오시렵니까?
아지랑이 춤사위에
모두가 한껏 흥이 나면
이산 저 산 진달래꽃
발그스레한 볼 쓰다듬으며
그렇게 오시렵니까?
아!
지금 어렴풋이 들리는 저 분주함은
그대가 오실 저 길이
땅이 열리고
바람의 색깔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어서 오세요.
하얀 계절의 순백함을 배워
지금 내 손에 쥐고 있는
메마름을 버리고
촉촉이 젖은 가슴으로
그대를 맞이합니다.
그대!
오늘밤 꿈같이 오시렵니까?
봄 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봄볕 속의 길
-조태일
구겨진 마음들을
어서 어서 펴서
아른아른한 아지랑이
부드럽게 춤추며
봄볕 속의 길로 나서자.
착하고 격렬했던 뜻들을
서로 나누어 가지며
너와 나의 길
가릴 것 없이
우리들의 길로 한데 합쳐서
손에 손에 자식들을 이끌어
한형제로
앞서가며 뒤서가며
마음을 활짝 열어
깨어나는 생명들의 소리를 듣자.
파고다공원에 내리는 봄볕도
수유리 4.19 기념탑에 내리는 봄볕도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추나니,
춤을 추나니.
이른 봄 저녁 무렵
-정희성
이른봄 저녁 무렵
새로 나온 이시영 시집을 읽으며
그 행간에 자리잡은
적요에 잠겨 눈을 지그시 감다가
문득 놀라 창문 열고 내다보니
언제 지었을까
아직 새 잎 돋지 않은 가문비나무 우듬지에
얼기설기 얽어놓은 까치 둥우리
새는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나는 하늘빛 고요
옳거니!
세상의 소란이 나를 눈감게 하고
저 고요가 나를 눈뜨게 하느니
때때로 봄은
-문정희
때때로 봄은
으스스한 오한을 이끌고
얇은 외투 깃을 세우고 온다.
무지한 희망 때문에
유치한 소문들을
사방에다 울긋불긋 터트려 놓고
풀잎마다 초록 화살을 쏘아 놓는다.
때때로 봄은
인생도 모르는 젊은 남자가
연애를 하자고 조를 때처럼 안쓰러운 데가 있다.
봄이 오고 있다
-강은교
봄이 오고 있다
그대의 첫사랑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의 맨발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이 밟은 풀잎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이 흔들리는 바람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이 밟은 아침 햇빛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이 꿈꾼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반짝이는 이슬
곁으로 곁으로 맴도는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의 꿈 엷은 살 속
으로 우리는 간다. 시간은 맨머리로
간다. 아무도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갈 뿐, 그러다 햇빛이
되어 햇빛 속으로 가는
그대와 오래 만나리
만나서 꿈꾸리
첫사랑
되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눈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좀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나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무제치늪의 봄
-정일근
마음을 얻어야 손이 순응하는 법이다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을 위해 봄은 오고
바라볼 줄 아는 손을 위해 꽃은 핀다
물이 만든 물의 나라 무제치(舞祭峙)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도 물이니
물은 다투지 않고 평등하게 스며들고
겸허하여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꽃을 기다려 삼월 봄이 오고
봄을 기다려 사월 꽃이 피는
그 착한 물들이 빚어내는 빛나는 봄
오랜 마음의 친구가 내미는 손처럼
그 따뜻한 손 꽉 잡아보고 싶은
무제치늪의 봄
봄 기도
-강우식
하찮은 풀잎이라도 새싹들은
지뢰 밟듯 조심스럽다
담장 포도나무들은
차 스푼보다 작은 송이 송이 속에
좁쌀알만한 꿈들을 달고
바람 속에, 햇볕 속에 녹아 있고
사과나무는 하얗게 꽃 피어
벌들의 날개 짓에도 얼굴 붉혀라.
꿈 속에 꿈꾸던 내 사람아
이제는 혼수의, 인사불성의 긴 잠에서
죽이는 꽃들의 빛깔로, 향기로, 하늘거림으로
아픈 데서부터 깨어나
한 치 밖에 있는 봄 구경을 제발 좀 하여라.
단 하루만이라도 봄빛으로 눈 떠 보아라.
하늘빛이 시리도록 맑고 흰 눈동자를......
펑, 펑, 펑 꽃 터지듯 떠 보아라
봄날은 간다
-이승훈
낯선 도시 노래방에서 봄날은 간다
당신과 함께 봄날은 간다 달이 뜬
새벽 네시 당신이 부르는 노래를 들
으며 봄날은 간다 맥주를 마시며 봄
날은 간다 서울은 머얼다 손님 없는
노래방에서 봄날은 간다 달이 뜬 거
리로 간다 술에 취한 봄날은 간다
안개도 가고 왕십리도 가고 노래방
도 간다 서울은 머얼다 당신은 가깝
다 내 목에 두른 마후라도 간다 기
차는 가지 않는다 나도 가지 않는다
봄날은 가고 당신도 가지 않는다 연
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해가 뜨면 같이 웃고 해가 지면 같
이 울던 봄날은 간다 바람만 부는
봄날은 간다 글쟁이, 대학교수, 만성
떠돌이, 봄날은 간다 머리를 염색한
우울한 이론가, 봄날은 간다 당신은
남고 봄날은 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
바람에 휘날리더라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봄의 메시지
-유자효
설레고 싶다
달뜨고 싶다
신경을 올올이 곤두세우고 싶다
이국의 나무 냄새 같은 것
이방의 언어 같은 것
바다의 바람을 돛폭 가득히 안은
범선의 출항 같은 것
낯선 것은 언제나 신선하고
여행을 생각할 때마다
영혼은 때를 벗는다
모험을 도전하는 젊음에 의해
역사는 절망을 이겨 왔었고
세계는 생명의 자양을 얻었다
서투르고 싶다
어리고 싶다
순수를 제대로 볼 수 있을 때
금강석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싶다
꿈꾸고 싶다
봄은 전쟁처럼
-오세영
산천은 지뢰밭인가
봄이 밟고 간 땅마다 온통
지뢰의 폭발로 수라장이다.
대지를 뚫고 솟아오른, 푸르고 붉은
꽃과 풀과 나무의 여린 새싹들.
전선엔 하얀 연기 피어오르고
아지랑이 손짓을 신호로
은폐 중인 다람쥐, 너구리, 고슴도치, 꽃뱀---
일제히 참호를 뛰쳐나온다.
한 치의 땅, 한 뼘의 하늘을 점령하기 위한
격돌,
그 무참한 생존을 위하여
봄은 잠깐의 휴전을 파기하고 다시
전쟁의 포문을 연다.
봄을 위하여
-천상병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며 산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젠 봄기운이 화사하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 했는데
내가 어찌 이 말을 잊으랴?
봄이 오면
생기가 돋아나고
기운이 찬다.
봄이여 빨리 오라.
이른봄의 서정
-김소엽
눈 속에서도
봄의 씨앗은 움트고
얼음장 속에서도
맑은 물은 흐르나니
마른 나무껍질 속에서도
수액은 흐르고
하나님의 역사는
죽음 속에서도
생명을 건져 올리느니
시린 겨울밤에도
사랑의 운동은 계속되거늘
인생은
겨울을 참아내어
봄 강물에 배를 다시 띄우는 일
갈 길은 멀고
해는 서산 마루에 걸렸어도
겨울이 지나면
봄은 오게 되어 있나니
서러워 마라
봄은
겨울을 인내한 자의 것이거늘
해마다 봄이 되면
- 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쉼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둑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봄 편지
-이해인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 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인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둣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새봄·3
-김지하
겨우내
외로웠지요
새봄이 와
풀과 말하고
새순과 얘기하며
외로움이란 없다고
그래 흙도 물도 공기도 바람도
모두 다 형제라고
형제보다 더 높은
어른이라고
그리 생각하게 되었지요
마음 편해졌어요
축복처럼
새가 머리 위에서 노래합니다.
저 못된 것들
-이재무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맨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어느 봄날
- 나희덕
청소부 김씨
길을 쓸다가
간밤 떨어져내린 꽃잎 쓸다가
우두커니 서 있다
빗자루 세워두고, 빗자루처럼,
제 몸에 화르르 꽃물 드는 줄도 모르고
불타는 영산홍에 취해서 취해서
그가 쓸어낼 수 있는 건
바람보다도 적다
순서
- 안도현
맨 처음 마당가에
매화가
혼자서 꽃을 피우더니
마을회관 앞에서
산수유나무가
노란 기침을 해댄다
그 다음에는
밭둑의
조팝나무가
튀밥처럼 하얀
꽃을 피우고
그 다음에는
뒷집 우물가
앵두나무가
도란도란 이야기하듯
피어나고
그 다음에는
재 너머 사과밭
사과나무가
따복따복 꽃을
피우는가 싶더니
사과밭 울타리
탱자꽃이
나도 질세라, 핀다
한 번도
꽃 피는 순서
어긴 적 없이
펑펑,
팡팡,
봄꽃은 핀다
봄이 오는 소리
- 최원정
가지마다 봄기운이 앉았습니다.
아직은 그 가지에서
어느 꽃이 머물다 갈까 짐작만 할 뿐
햇살 돋으면
어떻게 웃고 있을지
빗방울 머금으면
어떻게 울고 있을지
얼마나 머물지
어느 꽃잎에 사랑 고백을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둠 내리는 시간에도
새로움 여는 봄의 발자국 소리에
마음은 아지랑이처럼 들떠만 있습니다
돌...돌...돌...
얼음 밑으로 흐르는 냇가
보송보송 솜털 난 버들강아지
이 봄에 제일 먼저 찾아 왔습니다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 반칠환
봄이 꽃나무를 열어젖힌 게 아니라
두근거리는 가슴이 봄을 열어젖혔구나
봄바람 불고 또 불어도
삭정이 가슴에서 꽃을 꺼낼 수 없는 건
두근거림이 없기 때문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아름다운 곳
- 문정희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
새로 난 것 한 가지도 없다
어디인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
모두가 낯익은 작년 것들이다
우리가 날마다 작고 슬픈 밥솥에다
쌀을 씻어 헹구고 있는 사이
보아라, 죽어서 땅에 떨어진
저 가느다란 풀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왔다
창백한 고목나무에도
일제히 눈펄 같은 벚꽃들이 피었다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봄이 될까
나도 그곳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
우리나라 꽃들엔
- 김명수
우리나라 꽃들에겐
설운 이름 너무 많다
이를테면 코딱지꽃 앉은뱅이 좁쌀밥꽃
건드리면 끊어질 듯
바람 불면 쓰러질 듯
아, 그러나 그것들 일제히 피어나면
우리는 그날을
새봄이라 믿는다
우리나라 나무들엔
아픈 이름 너무 많다
이를테면 쥐똥나무 똘배나무 지렁쿠나무
모진 산비탈
바위틈에 뿌리 내려
아, 그러나 그것들 새싹 돋아 잎 피우면
얼어붙은 강물 풀려
서러운 봄이 온다
봄에 소박하게 질문하다
-엄원태
몸 풀린 청량천 냇가 살가운 미풍 아래
수북해서 푸근한 연둣빛 미나릿단 위에
은실삼단 햇살다발 소복하니 얹혀 있고
방울방울 공기의 해맑은 기포들
바라보는 눈자위에서 자글자글 터진다
냇물에 발 담근 채 봇둑에 퍼질러앉은 아낙 셋
미나리를 냇물에 씻는 분주한 손들
너희에게 묻고 싶다, 다만,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산자락 비탈에 한 무더기 조릿대
칼바람도 아주 잘 견뎠노라 자랑하듯
햇살에 반짝이며 글썽이는 잎, 잎들
너희들에게도 묻고 싶다,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폭설과 혹한, 칼바람 따윈 잊을 만하다고
꽃샘추위며 황사바람까지 견딜 만하다고
그래서 묻고 싶다,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그대 생의 솔숲에서
- 김용택
나도 봄산에서는
나를 버릴 수 있으리
솔이파리들이 가만히 이 세상에 내리고
상수리나무 묵은 잎은 저만큼 지네
봄이 오는 이 숲에서는
지난날들을 가만히 내려놓아도 좋으리
그러면 지나온 날들처럼
남은 생도 벅차리
봄이 오는 이 솔숲에서
무엇을 내 손에 쥐고
무엇을 내 마음 가장자리에 잡아두리
솔숲 끝으로 해맑은 햇살이 찾아오고
박새들은 솔가지에서 솔가지로 가벼이 내리네
삶의 근심과 고단함에서 돌아와 거니는 숲이여
거기 이는 바람이여,
찬 서리 내린 실가지 끝에서
눈뜨리
눈을 뜨리
그대는 저 수많은 새 잎사귀들처럼
푸르른 눈을 뜨리
그대 생의 이 고요한 솔숲에서
봄날과 시
- 나해철
봄날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시가 씌어지기나 하나
목련이 마당가에서 우윳빛 육체를 다 펼쳐보이고
개나리가 담 위에서 제 마음을 다 늘어뜨리고
진달래가 언덕마다 썼으나 못 부친 편지처럼 피어있는데
시가 라일락 곁에서 햇빛에 섞이어 눈부신데
종이 위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씌어진 게 시이기는 하나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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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시 모음, 벚꽃에 관한 시, 하동 십리벚꽃길 꽃구경 (0) | 2023.0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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